연기로 그린 초상(빌 S. 밸린저)

 자칫 엉뚱한 사람에게 입을 놀렸다간 나는 끝장이다.
 내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전부 말이 되지 않는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여러 번 생각하고 되씹어 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꿈도 자주 꾼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하나씩 되짚어 보지만, 곧 흐려져 버린다. 연기를 한 통 가득 담아 그걸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시카고에서 수금 대행업을 하고 있는 대니 에이프릴은 젊었을 적에 한눈에 반한 여자의 사진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그는 몇 안 되는 단서를 쥐어짜가며 그녀를 찾아나간다. 한편 그 여인은 자신의 미모를 철저히 이용해 가며 신분상승을 꾀한다. 이 두사람의 이야기가 교차 서술되는 가운데,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지난 번에 읽은 '이와 손톱'의 결말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지만,(결말의 충격이 표지에서 선전하는 것보다 좀 약했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 묘한 긴장감과 박진감이 뭔가 여운을 남겨서 읽게 되었다. 일차적인 감상은 '이와 손톱'과 마찬가지로 내용 자체는 긴장감이나 스토리 진행은 재미있는데 역시 결말은 기대에 못 미쳤다. 책 표지에 적힌 충격의 결말이란 게 그다지... 하지만 결말의 충격이 덜 하긴 하지만 내용 전개 자체는 훌륭해서, 여자 잘못 만나면 X 된다...(이건 반대의 경우 - 남자 잘 못 만나면 X 되는 것도 마찬가지지만)라는 교훈까지 얻게 된다. 특히나 여자가 다음 계획을 위해 지금 만나는 사람의 등골을 빼먹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역시나 묘한 여운에 아직 출간되진 않았지만 판타스틱 과월호에 실린 '연기로 그린 초상'도 읽어 봐야겠다.

by Yggdrasil | 2008/08/31 16:08 | 독서 | 트랙백 | 덧글(0)

방과 후(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을 매우 흥미롭게 읽은 후, 동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면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는 나에게 '최소한의 재미는 보장해주는' 작가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우리 나라에 이미 나온 책도 많고 최근에 새로 번역되는 책도 많아서 읽어야 할 책 목록에서 항상 많은 비중을 차지했었다. 하지만 계속 읽다보니 왠지 문체가 좀 식상해진 감도 있고 해서 "이것만 읽고 당분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읽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물론 표지가 만화스럽게 예뻐서 충동적으로 구매했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동안 바빠서 책꽂이에 꽂아만 넣고 있던 중, 그 결심(?)을 흐리고 이 책은 미처 읽기도 전에 '회랑정 살인사건'을 또 읽어버렸다. 게다가 이걸 읽고도 그 결심을 실행하지 못 하고 요즘엔 동 작가의 '백마산장 살인사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게 이 작가의 마력인가 보다; 비교적 박력이 부족한 듯한 담담한 문체나 그다지 신기할 게 없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계속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세이카 여고의 수학교사인 마에시마는 2학기가 시작하고 나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 자신의 바로 옆에 화분이 떨어지고, 수영장에서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코드에 감전사 당할 뻔 한다. 그러던 중 밀실이었던 학교의 탈의실에서 학생지도부 주임이었던 무라하시 선생이 살해당하고, 경찰은 학교의 문제아였던 다카하라 요코를 의심하고 수사에 착수한다. 별다른 진전없이 수사가 진행되던 중, 학교 축제의 가장행렬 중에 피에로로 분장했던 동료교사 다케이 역시 살해당한다. 더 큰 문제는 다케이 선생이 분장한 피에로는 원래 마에시마가 분장하기로 한 것을 바꾼 것. 운 좋게 위기를 모면했지만 사건은 여전히 풀릴 생각을 안 하는데...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범인을 제대로 맞춘 적이 없기에 "이번엔 정말 이 사람이 범인이다!" 싶었는데 내가 생각한 사람은 범인이 아니었다; 나름 별 일 아닌 듯이 지나가는 듯한 복선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주요 사건과는 별 관계도 없는 내용이었고, 그냥 부차적인 내용이었을 뿐이다; 남들은 추리소설을 읽으면 범인이 뻔히 보인다고 하는데 나는 언제쯤 그런 경지에 이를 것인가... 잡설이 길었다. 각설하고, 배경설정이나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범인의 동기일수도 있고, 문제삼고자 하는 사회의 풍조일 수도 있고)는 요즘 시점에서 보면 진부하고 설득력이 부족할 수도 있는데, 책이 처음 나온 게 80년대라고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훌륭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최소한 평작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

 스포일 있을지도 모름.

by Yggdrasil | 2008/08/22 00:30 | 독서 | 트랙백 | 덧글(2)

고층의 사각지대(모리무라 세이이치)

※ 항상 그렇듯이 저자명은 본인 마음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로 통일합니다.

 호텔 업계의 거물 팰리스사이드 호텔 사장 구주 마사노스케가 사장 사무실로 쓰고 있던 객실에서 살해당한다. 당시 팰리스사이드 호텔은 당시 외국계 항공사와 업무 제휴를 하면서 주변 라이벌 호텔들을 따돌리고 업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판도. 1차적으로 사장 비서였던 아리사카 후유코가 범인으로 지목되나 철벽 같은 알리바이가 있을 뿐더러 이내 살해당하면서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지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DMB에서 나온 책들은 표지가 내용과 별 관계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군복무 중, 휴가 나와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을 계속 다른 책에 떠밀려서 미루고 있다가 이제야 읽었음.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인데, 그 전에 읽은 것이 학교 도서관에 있던 낡아빠진 '살인시집'(제목이 참 거창하면서 유치하다)이란 책이었는데, 당시의 감상은 별로 특출난 게 없어보였다. 캐릭터도 개성이 특출나지 않고 추리 요소도 그리 많지도 않고 트릭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고, 아무튼 그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느낌이 비슷해서 지루할 줄 알았는데, 이번건 꽤 괜찮은 작품이었다. 사실 일반적으로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증명 시리즈'도 읽어보지 않고 멋대로 이런 평가를 내린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확실히 다른 소설에 비해서 캐릭터가 튀지도 않고, 사건의 충격적인 요소도 많지 않다. 전에도 느낀 것은, 어떤 번뜩이는 영감의 중심인물이 사건을 해결한다는 느낌보다, 여러 형사들이 협력 수사를 반복하여 겨우 사건을 해결한다는 느낌이다.(오히려 현실적으론 있을 법하다만)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흥미로운 점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전직이었던 호텔맨의 경험을 살린 배경 설정, 트릭 설정의 리얼리티나, 본인이 항상 불만이던 것- 추리소설에서 나오는 밀실 트릭의 대부분 초현실적이고 복잡한 트릭을 싫어하는 나에겐 잘 이해되지 않는 게 많다는 점- 과는 다르게 비교적 가능할 법한 트릭이다.(그 대신 많이 충격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책 표지에 써 있는 광고성 멘트나 제목으로 미루어 보나 밀실 트릭을 주된 세일즈 포인트로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밀실 트릭은 책의 1/3이 지난 시점에서 이미 해결된다. 그 다음부터는 거의 굳어진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해체하기 위한 수사가 주된 내용인데, 오히려 앞의 밀실 트릭보다 이 알리바이를 해체하는 부분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 싶다. 작가의 전직을 충분히 활용한 알리바이 위조 트릭이나, 범인의 이동 시간을 극복하는 시간 단축 트릭 등이 더 돋보인다. 다만 최후의 증인이 너무 간단하게 결정적 증언을 해서 왠지 형사들이 사건을 해결한 게 아니라 증인이 해결한 느낌이다. 게다가 특별한 결말 없이 용의자의 진술로 끝을 내는 점도 마무리가 약해 보인다.(왠지 전에 읽었던 '살인시집'에서도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현실의 범죄가 만화나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동기가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리얼한 점은 사람에 따라 장점이 될 법도 하다.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트릭이 가미된 리얼한 수사물(?) 같은 느낌이다.

by Yggdrasil | 2008/08/07 21:29 | 독서 | 트랙백 | 덧글(4)

당신을 닮은 사람(로알드 달)

 ※ 아래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저자명은 '로알드 달'로 통일합니다.

 제목만 얼핏 보면 마치 뭔가 낭만적인-지나간 사랑에 대한 향수까지 일으킬 법한- 제목이다. 본인에게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같은 뭔가 엽기발랄한 글을 쓴다는 이미지가 박혀 있는 작가가 이런 로맨스 소설 같은 걸 쓰다니!하고 선뜻 집어들었으나... 책 뒷표지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심지어 '당신을 닮은 사람'은 책에 실린 단편들 중 하나의 제목도 아니다. 내용은 원래 생각했던 대로, 좀 기분나쁘고 섬뜩한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본 도서에는 주로 도박에 관한 인간의 집착과 광기를 다룬 소설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그 중에서 '맛', '남쪽에서 온 사나이', '바다 속으로'가 기억에 남는다. 작품들이 단편이다 보니(마지막 작품인 '클라우드의 개'는 단편이 여러개 붙은 중편 길이 정도는 되지만) 저자는 마지막에 결론 혹은 반전만 제시해 놓고 도망가 버린달까,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건지 아니면 사건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반전만 제시하고 끝내버려서, 독자들은 그 결과에 충격만 받고 미묘한 여운에 사로잡혀 주인공에게 벌어질 일, 혹은 벌어졌던 일만 상상하게 된다.

 아무튼 각 작품들이 워낙 짧다 보니 각 작품의 스토리에 대한 요약은 생략합니다. 그랬다가는 스포일이 될 거 같아서요.

by Yggdrasil | 2008/07/25 01:24 | 독서 | 트랙백 | 덧글(3)

독서 총결산(2008.1.13~2008.7.12)

■ 소설
외과실(이즈미 교카)
이와 손톱(빌 S. 밸린저)
회랑정 살인사건(히가시노 게이고)
당신을 닮은 사람(로알드 달)

■ 비소설
인도 기행(법정)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이번 6달은 이것 저것 바빠서 진짜 몇권 안 읽었습니다. 집이 이사해서 버스나 전철에 타 있는 시간이 줄어든 것도 책을 안 읽은 원인에 한몫 했고, 무사히 잘 끝나긴 했지만 그렇게 압박을 주던 면접도 한몫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압박을 주던 학기도 그렇고요. 아무튼 방학 했으니 책이나 좀 많이 봐야겠구나 싶었는데 이거 방학했더니 논문이다 뭐다 의외로 바쁘고 정신없네요. 갑자기 게임에 빠진 것도 그렇고... 아, 지난 6달 동안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책은 한 권도 손 안 댔네요.

 ※ 그리고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위에 표기된 동서 출판사에서 나온 '당신을 닮은 사람'은 저자명이 '로얼드 달'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냥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로알드 달'로 통일합니다.

by Yggdrasil | 2008/07/13 20:26 | 독서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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